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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시간은 왜 짧았나"…멕시코 황제 아구스틴 1세의 짧고 격렬한 통치

4월 19일
3분 분량

멕시코 역사에서 아구스틴 1세(Agustín I)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신생 국가 멕시코의 독립을 완성한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동시에 독립 직후 스스로 황제로 즉위해 불과 몇 달 만에 몰락한 군주이기도 했다. 독립의 영웅이자 권력욕의 상징, 국가 건설의 주체이자 제국 붕괴의 책임자로 동시에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본명은 아구스틴 코스메 다미안 데 이투르비데 이 아람부루(Agustín Cosme Damián de Iturbide y Arámburu)였다. 그는 1783년 9월 27일 바야돌리드, 오늘날의 모렐리아에서 태어났고, 10대 후반부터 식민지 군대에 들어가 군 경력을 쌓았다.


멕시코 독립전쟁 초기에는 반란군이 아니라 스페인 왕실을 지지하는 왕당파 장교로 싸웠다.

즉 후일 독립 멕시코의 황제가 된 인물은 원래 독립운동을 진압하던 쪽에 서 있었던 셈이다.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1820년 이후 스페인 본국의 정치 변화였다. 본국에서 자유주의 헌정이 부활하자, 뉴스페인 식민지의 보수 엘리트와 교회, 군부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릴 것을 우려했다.


이투르비데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비센테 게레로 등 반군 세력과 손을 잡았고, 1821년 2월 ‘이괄라 계획(Plan de Iguala)’을 내놓았다. 이 계획은 가톨릭 신앙의 유지, 멕시코 독립, 그리고 스페인계와 크리오요(아메리카 식민지 지역에서 태어난 유럽인의 자손)·메스티소(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사이의 혈통)를 아우르는 통합을 핵심 원칙으로 삼았다. 이른바 ‘세 가지 보장’이었고, 이때의 삼색이 훗날 멕시코 국기의 기원이 됐다.


이괄라 계획은 단순한 군사 선언이 아니라 독립을 현실로 만든 정치 타협안이었다.

보수층은 가톨릭과 질서 유지를 원했고, 반군은 독립을 원했으며, 이투르비데는 이 둘을 묶어냈다.


이후 ‘삼보장군(Ejército Trigarante/821년부터 1823년까지 멕시코 독립 전쟁 기간 동안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이끌었던 군대)’이 멕시코시티에 입성하면서 사실상 독립이 완성됐다.

멕시코는 처음부터 공화국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유럽식 입헌군주제를 염두에 둔 신생 국가로 출발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문제는 누가 왕이 될 것이냐였다.

독립 직후 구상은 스페인 부르봉 왕가 인물을 멕시코 왕좌에 앉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정치적 공백은 빠르게 이투르비데 개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1822년 5월 18일 멕시코시티의 군부와 지지 세력이 그를 황제로 추대했고, 이튿날 의회 다수는 이를 승인했다. 그해 7월 21일 그는 화려한 의식 속에 아구스틴 1세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황제로서의 통치는 처음부터 불안정했다. 가장 큰 이유는 국가 기반이 너무 약했다는 점이다. 멕시코는 막 독립을 이룬 직후였고, 재정은 고갈돼 있었으며, 행정 체계도 허약했다. 제국은 넓었지만 세금은 충분히 걷히지 않았고, 독립전쟁의 상흔은 깊었으며, 중앙권력에 대한 합의도 부족했다. 황제라는 상징은 컸지만, 그것을 떠받칠 재정과 제도는 거의 없었다.


정치적으로도 그는 빠르게 고립됐다. 독립을 함께 이끈 세력 내부에는 군주제를 지지하는 보수파, 의회 중심 정치를 원하는 자유주의자, 지역 자치에 무게를 두는 지방 세력이 뒤섞여 있었다.


이투르비데는 자신을 비판하는 의회와 충돌했고, 결국 1822년 말 의회를 해산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 결정은 그의 짧은 통치에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황제가 질서를 세우기 위해 강권을 택했지만, 그 순간부터 그는 독립의 수호자가 아니라 권력을 움켜쥔 군사 통치자로 비치기 시작했다.


그의 몰락은 매우 빨랐다.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와 과달루페 빅토리아 등 반대 세력이 1823년 초 ‘카사 마타 계획(Plan de Casa Mata/의회를 복원하고 제국을 무효화하며 이투르비데의 황제 자격을 박탈하는 것으로 멕시코의 국가 형태를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바꾼다는 내용)’을 내세워 반기를 들었고, 이 운동은 곧 전국적 반이투르비데 흐름으로 번졌다.


황제는 피를 더 흘리지 않기 위해 의회를 복원했지만 이미 정세는 기울어 있었다. 그는 1823년 3월 19일 퇴위를 선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으로 떠났다. 황제로 군림한 시간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그의 통치가 짧았던 이유는 단순히 반대파가 강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멕시코 독립 직후 국가가 어떤 체제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었다는 데 있다.


입헌군주제는 일시적 안정 장치로는 매력적일 수 있었지만, 독립전쟁을 거치며 형성된 정치 세력은 이미 공화주의와 지역주의, 군부 정치라는 다른 동학을 강하게 품고 있었다. 이투르비데의 제국은 너무 일찍 왕관을 썼고, 너무 늦게 국가를 만들려 했다.


망명 이후 그의 선택도 비극을 키웠다.

그는 이탈리아와 영국에 머물렀다가 1824년 멕시코로 돌아왔다. 본인은 국가가 외세 위협에 처했다고 믿고 귀국했다고 주장했지만, 멕시코 의회는 이미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귀국 시 사형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려 둔 상태였다. 그는 타마울리파스의 파디야에 상륙하자마자 체포됐고, 1824년 7월 19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독립을 이끈 인물이 독립 국가의 법에 의해 처형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멕시코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그의 유해는 멕시코시티 대성당으로 옮겨졌고, 독립 완수의 공로 자체는 다시 인정받았다. 즉 멕시코는 이투르비데를 완전히 영웅으로도, 완전히 악인으로도 정리하지 못했다. 그는 독립을 성취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새 국가의 정치적 가능성을 좁힌 인물로 남았다.


오늘날 역사학계 다수는 그를 개인적 야망이 강한 군사 지도자로 보면서도, 멕시코 독립이 성공하는 데 그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아구스틴 1세의 짧은 통치는 결국 멕시코 건국 초기의 불안과 모순을 압축해 보여준다.

독립은 이뤘지만 국가체제는 정해지지 않았고, 통합을 외쳤지만 지역과 이념은 갈라져 있었으며, 황제는 탄생했지만 제국은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통치는 짧았지만, 멕시코 현대 정치의 원형을 보여주는 역사적 실험으로는 매우 길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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