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도 베레모도 없었다…멕시코 테포소틀란에서 결혼한 '체 게바라'의 알려지지 않은 2년
- 멕시코 한인신문
-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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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혁명가 가운데 한 명인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Guevara de la Serna). 후세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덥수룩한 수염과 베레모, 군복 차림이지만 1955년 8월 18일 멕시코주 테포초틀란(Tepotzotlán) 시청에 나타난 27세의 아르헨티나 청년은 전혀 달랐다.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기고 넥타이를 맨 젊은 의사였고, 그의 곁에는 페루 출신 경제학자이자 정치활동가인 30세의 힐다 가데아(Hilda Gadea Acosta)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이날 정오 테포초틀란 민사등록소에서 부부가 됐다. 혼인증명서에는 게바라의 직업이 ‘의사(médico)’, 거주지는 놀랍게도 ‘Hospital General’로 기록돼 있다.
이 결혼은 단순히 유명 혁명가의 사생활에 남은 흥미로운 일화가 아니다. 게바라가 멕시코에 머문 약 2년은 의사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혁명가 ‘체 게바라’로 변해가는 결정적인 시기였다. 그는 멕시코에서 의사와 연구자로 일했고, 생계를 위해 사진을 찍었으며, 첫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라울 카스트로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혁명에 합류했다. 멕시코에서 체포돼 감옥에도 갔고, 결국 베라크루스의 툭스판(Tuxpan)에서 요트 ‘그란마(Granma)’를 타고 쿠바로 떠났다.
게바라가 멕시코에 온 것은 1954년이었다. 의대를 졸업한 뒤 중남미를 여행하던 그는 과테말라에서 하코보 아르벤스(Jacobo Árbenz) 정부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무너지는 과정을 직접 경험했다. 이 사건은 그의 정치적 급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의 타파출라를 통해 입국한 뒤 기차를 타고 멕시코시티로 향했다.
처음부터 멕시코에 정착할 생각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비자를 받아 가족을 만나거나 여의치 않으면 프랑스로 향하는 방안도 생각했지만 결국 멕시코에 머물게 됐다.
돈은 거의 없었다. 당시 게바라는 멕시코시티의 알라메다 등에서 행인들의 사진을 찍어 돈을 벌었고 의사로 일할 기회도 찾았다. 그러던 중 아르헨티나 의사 살바도르 피사니(Salvador Pisani)의 소개로 멕시코 종합병원(Hospital General de México)의 알레르기과와 인연을 맺었다. 심한 천식을 앓았던 그는 처음에는 환자로 이곳을 찾았지만 곧 의사 겸 연구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멕시코에서 실제로 의학 연구를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약 1년 반 동안 알레르기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피부 알레르기 반응을 연구했고, 1955년 5월에는 ‘Investigaciones cutáneas con antígenos alimentarios semidigeridos’라는 논문을 멕시코의 의학전문지 Alergia에 발표했다. 훗날 세계적인 게릴라 지도자가 되는 인물이 멕시코에서 정식 의학논문까지 발표했다는 사실은 그의 멕시코 시절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부분이다.
UNAM이 정리한 자료에서도 당시 게바라는 의학과 연구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한때 유명한 연구자가 되는 꿈을 갖고 있었으며 멕시코 의료기관들과 접촉했다. 다만 게바라가 UNAM에서 정식으로 근무했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의 전기를 연구한 파코 이그나시오 타이보 2세도 게바라와 UNAM의 직접적인 관계는 제한적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시기에 힐다 가데아도 멕시코로 왔다.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다. 페루의 좌파 정치운동에 참여했던 가데아는 망명생활을 하던 과테말라에서 게바라를 만났고 정치와 중남미 현실을 놓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졌다. 과테말라 정변 이후 두 사람은 결국 멕시코에서 다시 만나 함께 생활하게 됐다.
그렇다면 왜 결혼식 장소가 멕시코시티가 아니라 당시 작은 도시였던 테포초틀란이었을까.
여기에는 게바라가 멕시코 종합병원에서 맺은 인연이 있었다. 혼인증명서의 증인 가운데 한 사람인 알베르토 마르티네스 로사노(Alberto Martínez Lozano) 박사는 게바라와 Hospital General에서 함께 일했던 의사이면서 당시 테포초틀란 주민이었다.
현지 기록과 후대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게바라와 가데아를 테포초틀란으로 연결해 준 인물이었다. 다른 증인은 발타사르 로드리게스 에르난데스(Baltazar Rodríguez Hernández) 박사였다. 따라서 두 사람이 특별한 정치적 이유로 테포초틀란을 선택했다기보다 게바라의 병원 동료가 가진 현지 인맥을 통해 결혼 절차를 마련한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결혼에는 또 하나의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힐다 가데아는 임신 중이었다. 게바라는 결혼에 대해 상당히 고민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결국 혼인을 결정했다. 이듬해인 1956년 2월 멕시코시티에서 두 사람의 딸 힐다 베아트리스 ‘힐디타’ 게바라 가데아가 태어났다.
테포초틀란에서의 결혼식 자체는 화려하지 않았다. 시청에서 민사결혼 절차를 마친 뒤 일행은 인근 아시엔다 라 콘셉시온(Hacienda La Concepción)으로 이동해 결혼을 축하했다. 멕시코주 정부가 발간한 테포초틀란 역사자료에도 두 사람이 1955년 8월 18일 결혼한 뒤 이 18세기 예수회 계통의 옛 농장에서 축하연을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날 작성된 혼인증명서 자체가 훗날 하나의 ‘역사적 유물’이 됐다는 사실이다. 원본은 테포초틀란 민사등록소에 보관돼 있었는데 1998년 사라지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당시 지방 당국은 문서 절도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고, 이 사건은 게바라가 멕시코에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다시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결혼식을 올린 바로 그 1955년, 게바라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만남이 멕시코시티에서 이루어진다.
과테말라와 코스타리카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쿠바 혁명가들의 인맥을 통해 게바라는 먼저 라울 카스트로를 만났고, 이어 라울의 형 피델 카스트로를 소개받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첫 만남은 멕시코시티 타바칼레라(Colonia Tabacalera)의 호세 엠파란 49번지(José Emparán 49)의 한 아파트에서 이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눴고 게바라는 피델이 준비하고 있던 쿠바 원정대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 멕시코시티의 Café La Habana 같은 장소가 쿠바 혁명가들의 만남과 논의의 공간이 됐다. 이들은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쿠바 상륙작전을 멕시코에서 준비했다. 즉 쿠바혁명의 군사적 출발점 가운데 상당 부분이 쿠바가 아니라 멕시코시티와 멕시코주, 베라크루스에 있었던 셈이다.
게바라 역시 이때부터 의사보다 혁명가로서의 삶에 점점 깊숙이 들어갔다. 피델의 조직인 ‘7월 26일 운동(Movimiento 26 de Julio)’에 합류한 그는 원래 원정대의 의무담당 의사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군사훈련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원정대 훈련은 스페인 내전 참전 경험을 가진 알베르토 바요(Alberto Bayo)의 지도 아래 진행됐다. 멕시코시티 주변과 멕시코주의 여러 지역에서 사격, 체력훈련, 게릴라전술 등을 익혔으며 쿠바 상륙을 위한 무기와 자금도 비밀리에 준비했다.
그러나 멕시코 당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56년 6월 연방 보안당국은 피델과 게바라를 비롯한 7월 26일 운동 관계자들을 체포했다. 당국은 훈련시설과 은신처를 적발하고 무기와 탄약 등을 압수했다. 당시 멕시코 언론에도 “쿠바 침공을 준비하던 조직”의 체포와 압수된 무기가 크게 보도됐다.
피델과 체가 멕시코시티의 미겔 슐츠(Miguel Schultz) 수용시설에 함께 갇혀 있는 사진은 두 사람의 멕시코 시절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진 가운데 하나가 됐다. 훗날 쿠바혁명의 두 핵심 인물이 쿠바로 떠나기 불과 몇 달 전 멕시코 경찰에 체포돼 함께 수감됐던 것이다.
석방된 뒤 준비는 더욱 빨라졌다. 원정대는 결국 그란마(Granma)라는 소형 요트를 구입했다. 1956년 11월 25일 새벽, 게바라와 피델·라울 카스트로를 포함한 82명의 혁명대원은 베라크루스주 툭스판의 강을 떠나 쿠바로 향했다. 정원을 크게 초과한 작은 배에는 사람과 무기, 연료가 빽빽하게 실렸다. 7일 뒤인 12월 2일 쿠바 동부 해안에 도착하면서 쿠바혁명의 무장투쟁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게바라의 생애에서 멕시코는 단순한 ‘망명 중 경유지’라고 보기 어렵다. 1954년 과테말라에서 쫓겨나다시피 들어온 26세의 아르헨티나 의사는 멕시코에서 연구자·사진사·남편·아버지가 됐고,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혁명조직에 가입했으며, 군사훈련과 체포·수감을 거쳐 1956년 쿠바로 떠나는 혁명가가 됐다.
특히 테포초틀란의 혼인증명서는 그 변화의 한가운데를 포착하고 있다. 사진 속 남자에게는 아직 훗날 그의 상징이 되는 수염도, 베레모도 없다. 직업란에는 ‘게릴라’나 ‘혁명가’가 아닌 ‘의사’, 주소에는 ‘Hospital General’이라고 적혀 있다. 불과 15개월 뒤 그는 베라크루스 해안을 떠나는 그란마호에 올라 쿠바로 향했다.
그런 의미에서 멕시코는 체 게바라가 잠시 머물렀던 나라가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젊은 의사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역사 속의 ‘체 게바라’로 바뀐 장소가 바로 멕시코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