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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사 2> 스페인 식민지 권력은 차풀테펙을 어떻게 다시 쓰기 시작했나

스페인의 정복 이후 차풀테펙은 더 이상 멕시카 통치자의 성역으로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정복이 곧 장소의 의미를 지워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식민 권력은 이 숲이 원래 지녔던 전략성과 상징성을 자기 방식으로 흡수했다.

물이 풍부하고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으며 이미 권위의 기억이 축적된 공간, 이것이 식민지 시대 차풀테펙이 다시 선택된 이유였다. 멕시코 국립역사박물관에 따르면 1530년 카를로스 5세는 칙령을 통해 차풀테펙 숲을 멕시코시의 재산으로 삼았고, 초창기 총독들은 이곳을 산책과 사냥, 휴양의 장소로 활용했다. 원주민 제국의 신성한 장소가 식민 엘리트의 여가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차풀테펙은 단순한 숲이 아니라 도시 지배층의 거리 두기를 상징했다.

식민 수도 멕시코시티의 중심과 가까우면서도 약간 떨어진 이곳은 권력자들이 대중과 분리된 채 휴식을 취하기에 적합했다.

총독 루이스 데 벨라스코는 16세기 말 언덕 기슭에 휴양용 궁전을 짓게 했는데, 이는 차풀테펙이 제국 시대 왕실의 숲에서 식민 권력의 정원으로 넘어가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다만 이 건물은 1784년 화약 폭발로 파괴됐고, 이듬해 베르나르도 데 갈베스 총독이 언덕 정상에 새로운 궁전 건설을 시작한다. 훗날 이것이 차풀테펙 성(Castillo de Chapultepec)으로 자리 잡게 된다.


차풀테펙 성의 탄생은 장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언덕 위에 세워진 건축물은 더 이상 숲속의 은밀한 별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시각적 선언이었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고지대,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점, 그리고 오래된 상징 자본이 결합된 차풀테펙 언덕 위에 궁전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식민 권력이 멕시코 분지의 풍경 자체를 지배의 형식으로 재배치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궁전은 건설 이후 여러 차례 방치되거나 용도 변경을 겪는다. 독립전쟁기에는 버려졌고, 이후 멕시코시 정부가 이를 사들이면서 다시 군사·국가 공간으로 전환된다.


19세기 들어 차풀테펙은 멕시코 국가의 불안정한 탄생 과정을 그대로 비추는 장소가 된다.

1845년 이 숲은 군사학교 생도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1847년 미국-멕시코 전쟁의 한복판에서 가장 상징적인 전투 현장으로 기록된다. 바로 차풀테펙 전투(Battle of Chapultepec)다.

당시 차풀테펙 성은 멕시코 군사학교와 연계된 방어 거점이었고, 미국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후 멕시코 역사에서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 패배가 아니라 '소년영웅들'을 뜻하는 *‘니뇨스 에로에스(Niños Héroes)’의 희생으로 기억된다. 멕시코 국립역사박물관과 관련 기관들은 이 사건이 국가적 영웅 서사의 핵심을 이룬다고 설명한다.


 

*차플테펙(Chapultepec) 성 전투

1847년 9월 13일 미국의 침략 전쟁을 일컫는다. 당시 미국군은 약 7,000명 이상의 병력과 대포를 동원해 차풀테펙 언덕을 공격했다. 반면 성을 방어하던 멕시코군은 약 800~1,000명 정도에 불과했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훈련 중인 사관생도였다. 미국군은 먼저 포격으로 성벽을 약화시킨 뒤 보병을 투입해 언덕을 올라 공격했다.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던 멕시코군은 결국 방어선을 유지하지 못했고, 격렬한 전투 끝에 차풀테펙 성은 함락되었다. 이 전투의 패배는 곧 멕시코시티 함락으로 이어지며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전투가 끝날 무렵 대부분의 멕시코 군대는 철수 명령을 받았지만, 일부 사관생도들은 끝까지 성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이때 전사한 6명의 생도들이 바로 Niños Héroes(소년 영웅들)이다.



차플떼펙 공원 입구를 들어서면 6명의 소년 영웅을 의미하는 6개의 탑이 조형물로 세워져 있다.

각국의 수반이 멕시코를 방문하면 반드시 이곳에 들러 헌화하면서 뜻을 기린다. 멕시코 정부도 소년들이 전투에서 숨진 9월13일 이곳에서 매년 대통령이 참석하여 공식 추모식을 개최하고 있다.




전투 후 차풀테펙 숲은 큰 상처를 입었다.

INAH는 패전 뒤 적군 은폐를 막기 위해 언덕 일대의 나무가 전면 벌채됐다고 전한다. 이것은 차풀테펙의 역사에서 자주 간과되는 대목이다. 많은 이들이 차풀테펙을 숲과 성으로만 기억하지만, 실제로는 전쟁이 자연환경 그 자체를 파괴했고, 숲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전술 공간으로 취급됐다. 전쟁은 건물만 바꾼 것이 아니라 풍경까지 바꾸었다. 차풀테펙의 역사가 정치사이면서 동시에 환경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후 차풀테펙은 멕시코 제2제국 시기 또 한 번 극적인 변신을 겪는다.

오스트리아 출신 막시밀리아노 1세와 카를로타가 이 성을 황궁으로 사용하면서, 차풀테펙은 공화국의 방어 거점에서 유럽식 제국의 무대로 바뀐다. 프로 보스케 차풀테펙은 이 성이 실제 왕실 거주지로 사용된 아메리카의 유일한 왕궁 성채라고 소개한다.


막시밀리아노 부부는 성을 보다 거주하기 편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손질했고, 도시 중심과 궁을 잇는 대로 정비를 추진했다. 훗날 이 길은 파세오 데 라 레포르마(Paseo de la Reforma)로 발전하며 멕시코시티의 권력 축을 형성한다. 오늘날 수도의 대표 가로축이 사실상 차풀테펙 성의 황궁화와 맞물려 태어났다는 점은, 이곳이 단순한 역사 유적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공화정이 복원된 뒤에도 차풀테펙의 정치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성은 다시 군사학교, 천문대, 외빈 접견 공간 등으로 용도가 바뀌며 국가 장치의 일부로 기능했다. 이후 여러 대통령이 이곳을 공식 거처나 정치 공간으로 사용했고, 차풀테펙은 왕궁에서 대통령 권력의 상징으로 다시 전환된다.

결국 차풀테펙 성은 한 시대에만 고정된 공간이 아니었다. 식민 궁전, 군사학교, 전장, 황궁, 공화국 권력의 무대가 한 장소에 겹겹이 쌓였다.


이 시기의 차풀테펙을 이해하려면, 숲과 성을 따로 보아서는 안 된다. 숲은 성을 감싸는 배경이 아니라 권력을 보호하고 드러내는 장치였고, 성은 숲의 역사성을 국가 권위로 번역하는 기계였다.


식민 권력은 이곳을 휴양지로 소비했고, 독립 이후 국가는 이곳을 군사·제국·대통령 권력의 상징으로 재사용했다. 그래서 차풀테펙의 두 번째 시대는 ‘아름다운 성의 역사’가 아니라, 권력이 멕시코의 기억을 점유하는 방식의 역사라고 해야 더 정확하다.


차풀테펙이 오늘날에도 멕시코 근현대사의 축약판으로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숲과 성에는 정복, 식민 통치, 공화국의 불안, 대외전쟁, 제국의 실험, 대통령제의 상징 정치가 차례로 스며들었다.

멕시코가 어떤 나라가 될 것인지를 둘러싼 거의 모든 큰 싸움이 이 언덕을 지나갔다.

차풀테펙은 자연이 아니라 무대였고, 그 무대 위에서 멕시코의 국가 형태가 여러 번 갈아 끼워졌다. 이것이 차풀테펙 역사의 두 번째 장면이다.


숲은 살아남았지만, 그 의미는 권력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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