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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라 불린 멕시코 여성…죽어서도 150년 동안 끝나지 않았던 '비극'

8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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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미국과 유럽에서는 한 멕시코 여성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입장료를 내고 공연장으로 몰려들었다. 얼굴과 온몸에 짙은 털이 자라고 잇몸과 턱이 돌출돼 있다는 이유였다. 흥행업자들은 그녀를 ‘원숭이 여인(Ape Woman)’, ‘곰 여인(Bear Woman)’, ‘인간과 동물의 혼합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무대에 올라온 여성은 노래하고 춤을 추며 기타를 연주했던 전문 공연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줄리아 파스트라나(Julia Pastrana)였다.

줄리아의 삶이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것은 그녀가 희귀질환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살아서는 자신의 외모가 상품이 됐고, 죽어서는 시신까지 남편의 돈벌이에 이용됐다. 그녀의 유해는 유럽을 떠돌다 노르웨이의 대학에 보관됐고, 사망한 지 153년이 지난 2013년에야 멕시코로 돌아와 처음으로 인간다운 장례를 치렀다.


줄리아는 1830년대 멕시코 시날로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1834년 출생으로 소개되고 고향은 시날로아 북부 오코로니(Ocoroni) 일대로 전해지지만, 일부 연구에서는 1832년 출생으로 기록하는 등 정확한 생년월일을 확정할 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부모와 형제관계 역시 미스터리다. 현재까지 확인된 신뢰할 만한 역사자료에는 부모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부모가 줄리아와 같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 친형제나 자매가 있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인터넷에서 널리 퍼진 “부모가 괴물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가족에게 버림받아 산속을 떠돌았다”, “집에서 도망쳐 나오다 서커스 관계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줄리아의 어린 시절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여러 이야기가 만들어졌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출생·가족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일부 전승에서는 어린 줄리아가 보호를 받은 뒤 세례를 받고 ‘Julia Pastrana’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이후 시날로아의 유력 인사 집에서 일했다고 전한다. 시날로아 주지사였던 Pedro Sánchez의 집에서 가사 일을 했다는 기록도 여러 전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의 어린 시절은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한 시기와 비교하면 확인 가능한 자료가 매우 부족하다.


현대 의학에서 줄리아는 더 이상 ‘괴물’이나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 존재’가 아니다. 1993년 American Journal of Medical Genetics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보존된 시신과 과거 의학기록 등을 분석한 결과 줄리아가 선천성 전신 다모증과 치은증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얼굴과 신체에 굵고 짙은 털이 자라고 잇몸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면서 입과 턱이 돌출돼 보이는 희귀질환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유전학도 희귀질환에 대한 의학적 이해도 부족했다. 일부 의사와 자연과학자들조차 그녀를 인간과 다른 종 사이에 있는 존재처럼 묘사했고, 흥행업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공연 홍보에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줄리아가 멕시코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854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공연을 시작한 그녀는 곧 ‘The Nondescript’, ‘Ape Woman’, ‘Bear Woman’, ‘Female Hybrid’ 등의 이름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녀의 공연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줄리아는 노래와 춤을 배웠고 기타를 연주했으며 여러 기록에는 영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로 공연했다고 전해진다. 메조소프라노였던 그녀는 미국에 이어 영국 런던과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유럽 여러 도시의 무대에 올랐다.


1857~1858년에는 당시 유럽에서 유명했던 Renz Circus에서도 공연했다. 그녀는 점차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됐지만 명성이 높아질수록 공연 포스터와 신문광고는 그녀의 음악적 재능보다 얼굴과 신체를 더욱 자극적으로 부각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인 흥행업자 시어도어 렌트(Theodore Lent)가 그녀의 매니저가 됐다. 두 사람은 이후 부부관계가 된 것으로 널리 기록돼 있다. 렌트는 줄리아의 미국·유럽 순회공연을 관리했고 그녀의 희귀한 외모를 이용해 상당한 흥행수입을 올렸다.


1859년 줄리아는 임신했다. 이듬해인 1860년 3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아들을 출산했다.

여기에도 인터넷에서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다. “줄리아가 정상적인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아들에게도 어머니와 비슷한 다모증이 나타났다. 아이는 태어난 지 약 35시간 만에 사망했다.


줄리아 역시 출산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출산 후 감염과 복막염이 발생했고 1860년 3월25일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나이는 20대 중반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비극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렌트는 줄리아와 아들의 시신을 모스크바대학 관계자들에게 넘겨 방부처리하도록 했다. 이후 두 시신을 다시 확보한 그는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유럽을 돌며 관객들에게 돈을 받고 아내와 아들의 시신을 전시했다.


살아 있을 때 외모를 상품화했던 흥행사업이 사망 후에는 시신을 전시하는 사업으로 바뀐 것이다.

렌트는 이후 줄리아와 비슷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독일 여성 마리 바르텔(Marie Bartel)을 만나 ‘Zenora’라는 예명으로 공연시켰다. 흥행을 위해 그녀를 줄리아의 여동생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지만 실제 혈연관계는 없었다.


줄리아에게 실제 형제나 자매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는다. 렌트가 사망한 뒤에도 줄리아와 아들의 유해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유럽을 떠돌았다. 1921년에는 노르웨이의 흥행업자 Haakon Lund가 두 시신을 구입했고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대중에게 전시됐다.


1970년대 들어 인간의 시신을 돈을 받고 보여주는 행위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커지면서 공개전시는 사실상 중단됐다. 1976년 두 시신이 보관돼 있던 오슬로 인근 창고에 침입사건이 발생하면서 유해도 심하게 훼손됐다. 줄리아의 팔 일부가 손상됐고 아들의 시신은 이후 사라졌다.


이 때문에 “줄리아의 시신이 여러 번 도난당한 끝에 2005년 노르웨이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서 퍼졌지만 노르웨이 공식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 줄리아의 유해는 경찰이 회수해 오슬로 법의학기관으로 옮겼으며 1990년 언론보도를 통해 보관 사실이 다시 알려졌다. 1997년에는 오슬로대학으로 이관됐다.


이때부터 논쟁의 성격이 달라졌다. 더 이상 ‘신기한 시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연구윤리의 문제가 됐다. 과학연구를 위해 계속 보존해야 하는지, 아니면 한 인간으로서 장례를 치러야 하는지를 놓고 노르웨이에서 논의가 이어졌다.



153년 동안 미국과 유럽의 공연장을 떠돌았던 멕시코 여성이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다.

2013년 2월12일 시날로아주 Sinaloa de Leyva의 Panteón Histórico Municipal, 93번 묘역에 안장되면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동물처럼 학대받으며 고통속에 살았던 그녀는 비로소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줄리아의 귀환을 결정적으로 이끌어낸 사람은 멕시코계 예술가 로라 앤더슨 바르바타(Laura Anderson Barbata)였다. 그녀는 2000년대 중반부터 줄리아의 유해를 멕시코로 돌려보내기 위한 활동을 벌이며 오슬로대학과 노르웨이 당국, 멕시코 정부 및 시날로아주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2012년에는 당시 시날로아 주지사 Mario López Valdez가 공식적으로 유해 반환 요청에 참여했다. 멕시코 외교당국과 시날로아주 정부도 절차에 나섰고 노르웨이 연구윤리기관 역시 유해 반환을 지지했다.


오슬로대학은 결국 반환에 동의했다. 조건은 명확했다. 줄리아의 유해를 다시 전시하지 않고 화장하지 않으며, 종교적 전통에 따라 제대로 매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줄리아가 1860년 러시아에서 사망한 뒤 150년 넘게 제대로 된 법적 신분조차 갖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국제적으로 유해를 운송하기 위해서는 공식 사망 관련 서류가 필요했고 멕시코와 시날로아 관계기관은 이를 마련하기 위한 행정절차를 진행했다.


마침내 2013년 2월 줄리아의 유해가 노르웨이를 떠났다. 유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는 과거 그녀의 시신을 세워놓고 전시하기 위해 발에 설치했던 금속 장치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53년 동안 미국과 유럽의 공연장, 창고, 법의학기관과 대학을 떠돌았던 멕시코 여성이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2013년 2월12일 시날로아에서는 줄리아를 위한 가톨릭 장례미사가 열렸다.

이후 그녀는 시날로아주 Sinaloa de Leyva의 Panteón Histórico Municipal, 93번 묘역에 안장됐다. 출생지로 알려진 오코로니와 가까운 지역이다.


멕시코로 돌아온 것은 그녀의 시신뿐이었다. 태어난 지 하루 남짓 만에 사망했던 아들의 유해는 노르웨이에서 사라진 뒤 현재까지 행방이 확인되지 않았다.


줄리아 파스트라나의 삶은 오늘날 희귀질환을 가진 한 여성의 비극을 넘어 19세기 사회가 인간의 다름을 어떻게 소비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로 평가된다.


그녀에게는 노래와 춤, 언어와 음악적 재능이 있었지만 세상은 그것보다 얼굴에 난 털을 먼저 봤다. 흥행업자는 그것을 돈으로 바꿨고 일부 당시 과학자들은 그녀를 인간과 동물 사이의 존재처럼 연구했다. 남편이자 매니저였던 렌트는 그녀가 죽은 뒤에도 시신을 상품으로 이용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줄리아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남았지만 정작 그녀가 어디에서 정확히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였는지, 부모에게 같은 질환이 있었는지, 친형제가 있었는지와 같은 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가족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원숭이 여인’, ‘곰 여인’, ‘세계에서 가장 추한 여자’ 같은 흥행용 이름이 150년 넘게 그녀를 따라다녔다.


1860년 모스크바에서 숨진 줄리아는 그렇게 죽은 뒤에도 153년 동안 구경거리와 연구대상으로 떠돌았다. 그리고 2013년 2월, 고향 시날로아의 땅에 묻히면서 그 긴 전시는 마침내 끝났다.


묘지에 묻힌 사람은 19세기 흥행업자들이 만들어낸 ‘괴물’이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은 줄리아 파스트라나, 희귀질환을 가지고 태어나 평생 타인의 시선에 의해 삶과 죽음까지 상품화됐던 한 명의 멕시코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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