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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절반의 해외생활“후회는 없다”

23년간 멕시코 생활, 떠나는 김재현 전 한인회장 인터뷰

김재현 전 한인회장이 멕시코를 떠나면서 본지와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1938년생으로 올해나이 77세, 일반적으로 이정도의 나이면 이미 오래전에 은퇴를 할 법도 하지만 그는 아직도 정정한 모습으로 누구 못지않게 일에 대한 열정이 저 작은 체구 어디에서 의지와 집념이  나오는지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약33년 동안의 해외생활, 그중 23년간 멕시코에 살면서 교민사회가 발전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는 등 대표적인 성공한 사업가로도 알려진 그의 인생 막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재현 회장의 멕시코에서의 이력은 화려하다. 

제3대 한인회장, 한글학교 건립추진위원장, 옥타 부회장, 멕시코 옥타 초대회장, 평통위원, 문인협회 초대회장 등 어느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이력과 교민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남긴 그의 발자취는 지금의 한글학교는 물론 한인회, 옥타 등 그가 초석을 다져놓은 단체들의  왕성한 활동이  성과로 이어져 나타나고 있다.

 

이중에서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보람을 느끼는 부분은 한글학교 건립에 가장 먼저 깃대를 들고 앞장서면서 모금활동에 나섰다는 점과 이를 통해 한글학교가 세워졌다는 점이다.

이경태 리녹스 대표의 거액의 쾌척으로 불을 지폈지만 최초의 불쏘시게 역할을 자신이 했다는 점에서 그는 “큰 보람을 느낀다” 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다음으로 그는 옥타를 꼽는다. 아직까지 자신의 옥타 초대회장에 대한 예우와 회원들의 섭섭지 않은 대우(?)에 그는 가장 의리 있는 단체로 옥타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처럼 좌우와 상하를 아우르는 전 방위 활동은 멕시코 생활 초기에서부터 최근까지 항상 교민들과 함께하고자 노력하는 그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온화한 성품으로 늘 웃는 모습에서 이웃 아저씨 같은 편안한 외모이지만 자신의 소신과 맞지 않는 부분에서는 과감한 의견개진으로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강직한 태도를 보이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투사(?)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단체의 행사라도 있을 때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일쑤이고 그는 어렵지 않게 크든, 작든 성의껏 촌지를 전해주면서 격려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이야 사업은 물론 자식농사(3녀1남) 도 잘 지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런 그에게도 성공의 뒤안길에는 남들이 알지 못했던 인생스토리가 있었다는 사실과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다는 그의 이면에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제 그 스토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김재현 회장은 한국에서 10년간 기자생활(매일경제신문)을 하면서 관공서를 드나들게 됐고 이를 통해 많은 고급정보를 얻게 된다.
특히 코트라와 상공회의소에서 종종 무역관련 소식을 받아 신문에 싣던 그는 해외 바이어들이 문의하는 한국산 제품에 대한 정보를 가장 먼저 알게 되면서 점차 무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소망대로 기자라는 직업은 박봉에도 불구 애착이 있었지만 무역에 점차 눈을 뜨게 되면서 기자생활을 접게 된다.

마침내 10년간의 기자생활을 청산하고 무역에 뛰어들어 금반지 주문을 처음으로 받게 되는데 여기서 많은 이익을 보았단다. 재미를 붙인 김회장은 무역을 하면서 별도 사업으로 ‘새마을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었는데 여기에서는 애들 돌 때 들어온 돌 반지까지 팔아서 투자했지만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그 회사를 맡겨놓고 외국에 있는 동안 관리인이 회사를 팔아버린 것이다. 이를 계기로 무역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취급하던 품목은 액세서리였다. 당시 한국산 제품은 가격 경쟁력이 충분했다. 지금은 중국산이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당시에는 중국산이 없었기 때문에 손재주 좋은 한국산 제품이 인기를 끌었다.

 

더욱이 그때는 외국과의 소통에 텔렉스가 유일했는데 텔렉스는 영어를 할 수 없으면 무역 거래를 할 수가 없어서 영어에 제법 능통했던 김회장은 남들보다 톡톡히 이점을 활용할 수가 있었다. 이후 팩스가 출현하면서 너도나도 무역을 하는 본격적인 경쟁체제로 접어들게 되지만 텔렉스 시대에 김회장은 선택된 많지 않은 무역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이다. 

 

무역회사를 하면서 조금씩 성장하게 되자 “세계 곳곳에 해외 지사를 설립 하겠다“ 는 목표를 세우게 되는데 미국 국경에 위치한 국경도시 라레도를 방문하면서 이곳이 지사 설립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 곧바로 지사 설립을 하고 직원을 파견하게 된다.

 

이때가 1989년으로 이후 라레도(미국쪽) 에서만 13년간 거주하면서 사업의 기반을 잡게 된다. 

처음 1년간은 무척 힘들었단다. 당시 멕시코는 GATT(관세무역일반협정) 미가입 국가여서 수입이 자유롭지 못해 국경도시 라레도는 밀수제품을 취급하는 시장이 활발했었다.

 

그러나 지사로 파견한 직원의 가정문제와 이를 지적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직원의 갑작스런 퇴사로 지사 운영에 어려움을 겪자 결국 자신이 직접 이곳에 오게 되면서 해외생활이 시작되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생각보다 무역업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한국에서 수입을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고 특히 수입과 동시에 또 물건을 준비해야 하는 무역업의 특성상 자금난에 시달리게 된다.
 

▲ 김재현회장에게 있어 아내는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이며 인생항로의 나침반 역할을 해왔지만 그녀는 늘 몇 걸음 뒤에서 자신을 감춰온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모습을 보여왔다

회사가 커지면서 자금이 더 필요했고 결국 지인들로부터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당시 주변이나 납품업자로부터 성실한다는 평을 받은 덕분에 돈을 빌리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그러나 사업규모는 커져갔지만 내용에서는 썩 좋지 못했다. 돈도 아내 모르게 빌리게 되면서 금액도 더 커져갔다. 반면에 판매는 이를 받쳐 주지 못해 결국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액수가 늘어나자 빚을 갚을 길이 없다고 판단돼 어느 날 아내를 불러놓고 이실직고를 하게 된다. 

 

다시 직장생활로 돌아가도 20년 이상을 해야만 빛 청산이 가능할 정도로 빚이 많아져 도저히 돈을 갚을 수 없을 것 같으니 함께 자살하자고 제의 한 것이다.

 

이같은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던 아내는 한참 동안 자신을 쳐다보더니 “당신은 사업가가 아니다. 이병철이 한태 물어봐라. 빚이 없는지? 빚 없는 사업가는 없다. 지금보다 2배 더 빚이 있어도 가능하니 걱정마라. 설사 실패한다고 한들 당신이 리어카를 못 끌겠느냐? 내가 광주리장사라도 못 할게 뭐가 있느냐?” 는 아내의 말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아내였지만 그토록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면서 당시 한국정부에서 특혜로 기자촌을 만들어 기자들에게 분양했던 집을 한 채 산적이 있었는데 이것을 팔고 남은 빚은 벌어서 갚기로 하고 재기를 모색하게 된다.

 

아내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에 새롭게 의지를 다지게 된 김 회장은 더욱 열심히 무역에 정열을 쏟게 되지만 자금은 늘 부족했다.

어느 날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에 현지 직원이 “무슨 고민거리가 있느냐?”는 물음에 “자금이 필요하지만 방법이 없다” 고 하자 평소 김회장의 신의와 성실한 모습에 그 직원은 “은행을 한번 찾아가 보라” 고 조언했다.

 

은행과는 거의 거래가 없었었지만 “밑져야 본전” 이라는 생각으로 은행을 방문했고 거기서 융자담당 직원이 대뜸 “얼마가 필요하느냐?”는 물음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6만불이 필요하다” 고 하자 은행직원은 그 자리에서 서류를 내어주면서 신청서를 쓰라고 했다.

 

은행직원의 도움을 받아 신청서를 쓰자 며칠 후 다시 오라고해서 은행을 찾아가니 6만불 L/C를 열어준 것이었다.


그에게 이 돈은 큰 도움이 됐지만 컨테이너로 수입하는 상태이다 보니 순환이 되지 않아 자금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부족해 다시 은행을 찾아 추가 자금을 요청하자 역시 “얼마가 더 필요하느냐?”는 물음에 “20만 불 정도가 더 있어야 컨테이너가 순환되면서 자금회전이 될 것 같다” 고 하자 역시 신청서에 서명하고 며칠 기다리자 또 20만불 추가 L/C(신용장 개설)를 열어주어 이 자금이 그의 사업을 일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은행 융자를 받으면 정확히 날짜를 지켰고 오히려 먼저 상환하면서 신용을 쌓아 은행거래는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그의 사업은 나날이 발전하게 된다.
어려움은 처음 1년 정도만 힘들었고 이후 은행의 도움과 시기적으로 호황이 겹쳐 사업은 승승장구하게 된다.


“정직하고 진실하면 누군가 도움을 주게 돼 사업은 성공할 수가 있다” 면서 얼굴하나로 은행에서 20만 불을 빌릴 수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었다.

 

라레도에서 완전한 사업기반을 잡은 상태인 93년, 드디어 멕시코가 GATT 가입을 하게 되면서 수입이 자유로워져 밀수 시장인 라레도의 특성이 없어지게 되면서 이때 또 한 번 멕시코 이주라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미 어느 정도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른 상태에서 멕시코시티로의 이주는 별다른 어려운 점 없이 정착하면서 오늘의 김 회장을 있게 한다.

 

자금과 노하우를 접목한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고 비로소 멕시코 교민사회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여유도 생기게 된다. 그 첫 번째로 교민회장에 추대 받으면서 이를 수락, 3대 교민회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교민회장직을 맡는 계기로 한인사회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한글을 모르면 배우지 못해 가난을 면치 못하는 현지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한글학교에 특히 눈길을 주게 된다. 당시 한글학교는 대사관 지하에서 학교를 열었는데 대사관에서 직접 관장하고 있었다.
 

한글학교는 이후 우남대 근처 가정집을 임대해 운영하다가 “너무 멀다”는 지적에 따라 대사관 옆 고급주택을 임대받아 운영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한글학교 학생이 많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한글학교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옮겨 다니게 되는데 가정집에서 학교시설이 들어선 것에 대한 이웃들의 항의민원과 학교시설을 함부로 사용하면서 학교 측이 난색을 표시, 고정시설을 갖춘 학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떠돌이 생활을 벗어나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 이를 계기로 한글학교 건립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한글학교 건립을 위한 모금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의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된다” 는 말로 당시의 자신의 입장에서 공금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던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김회장은 “공금을 개인용도로 사용하면 결과가 반드시 좋지 않다” 는 말로 공금에 대해서는 공정하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처음 그가 내놓은 2만 불이 한글학교 건립 모금의 시초로, 이후 한글학교는 오랜 시간이 지나 이경태 리녹스 대표가 거액을 쾌척하면서 건물 구입이라는 결실로 나타났으며 김재현 회장이 “한글학교 건립추진위원장”의 중책을 맡는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 멕시코 옥타 초대 회장을 지낸 김재현회장은 가장 의리있는 단체로 '옥타' 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재현 회장은 현재의 한글학교 건물 구입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백년을 바라본다면 지금의 건물은 문화재 건물로 낡아서 관리비와 수리비가 만만찮게 들어갈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운영에 많은 비용이 지출되는 악순환을 겪게 되는 만큼 자신이 주장했던 다른 건물이 왜 선택받지 못했는지에 대해 지금도 너무 아쉽다고 토로한다. 


(김재현 회장이 주장했던 건물은 소나로사 암브르고에 있던 건물로 당시 발레를 가르치는 국가소유 건물이었다. 위치나 입지조건이 훨씬 좋아 제대로만 지었다면 건물을 활용한 수익사업이 가능해 장차 합법적인 학교설립에 필요한 재원 마련도 어렵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이다.)

 

이제 그런 아쉬움도 뒤로하고 한글학교는 현재의 위치에 ‘건물구매’라는 형식으로 매입을 했으며 뒤편 정원을 증축하면서 강당을 새로 만드는 등 많은 변화도 있었다.

  한편 발명특허로 미국 인명사전에도 등재돼 있다는 ‘김재현’의 이름은 미국에서도 라이온스 클럽 부회장을 지내면서 자신에 대한 나쁘지 않은 평가가 나올 때마다 스스로 잘못 살아오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고 회고한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에서도 한국인들의 이미지 개선에 앞장서 ‘길거리청소’라는 남들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독특한 아이디어로 교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꽈우떼목구 거리를 정기적으로 청소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관공서는 물론 현지인들과 거리 좁히기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이는 김회장 스스로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며 보람 있는 일로 꼽는 부분이다.

 

교민사회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도 잊지 않았다.
“멕시코 교민사회가 발전하려면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눈앞의 이익에만 치중하지 않았으면 한다” 는 그는 더욱이 “앞으로 교민사회가 단결하지 않으면 멕시코에서 한국인들의 이미지와 권리주장에는 한계가 있을 것” 으로 예상했다.

 

이를 위해 “함께 잘 살아보자” 는 정신 계몽운동이 필요한 시점으로 이는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한 만큼 젊은 인재를 육성하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남미국가를 방문하면서 했었다는 설교를 예로 들었다.


한국인은 “너 죽고 나죽자” 고 경쟁하는 반면에 일본인은 ”너 죽고 나살자“로 중국인은 ”너도 살고 나도 살자“고 한다면서 우리 교민들도 이제는 같이 잘사는 교민사회가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신의가 중요하다“는 말로 최근의 일련의 교민들의 사기행각에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본인에 대한 평가는 반반이지만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 는 말로 “후회 없는 멕시코에서의 삶을 살았다” 고 강조하는 김재현 전 한인회장은 “짧지 않은 23년간 멕시코에서 사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모든 교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면서 ”언제든 마음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멕시코는 비록 몸은 떠나지만 내 마음은 항상 이곳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할 것“ 이라면서 또 다시 만날 인연을 기약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이번 인터뷰는 지난 11월29일 모 호텔 식당에서 4시간여 동안 진행됐으며 12월8일 옥타 송별식을 끝으로 정든 멕시코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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