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국에서 이해찬 민주당 고문이 좌파정권의 '100년 집권론' 을 주장했다가 정권교체의 빌미를 주었다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무늬는 다르지만 똑 같은 목적을 둔 정치 형태가 최근 멕시코에서도 목격되고 있다.
퇴임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멕시코 대통령이 100년이 아닌, 영구 집권에 가까운 각종 제도정비를 위해 헌법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발표된 헌법 개혁안은 무려 20개에 이르는데 최상위 법으로 국가 근간의 기틀이 되는 헌법이 만약 이대로 개정된다면 그야말로 현 집권당이 영구집권에 가까운 절대 유리한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정치개혁으로 받아들여질 요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현 집권당을 위한 개정에 가깝다.
멕시코 '헌법의 날' 을 맞아 대통령이 주창한 헌법 개혁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간 최저임금 인상률을 물가 상승률보다 항상 상회하도록 보장
은퇴한 근로자가 최종 급여의 100%에 해당하는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연금 제도 개편
대법관 및 기타 판사를 시민들이 직접 선출
수많은 자치 정부 기관 폐지
연방 의원 수와 선거 및 정당 자금 지원을 위해 지출되는 예산 축소
주방위군을 군대에 통합
멕시코와 미국 간 갈등 원인인 물 공급 계약 파기 및 유전자 변형 옥수수 수입금지 등이다.
위 내용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은 대법관과 판사에 대해서 직접 선출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정부 들어 각종 개혁 정책을 대법원 판사가 발목 잡는다는 인식이 강해 직접 선출을 통해 집권당 정책에 동조하는 인물을 법권 최고위직에 앉힌다는 것으로 정치적 중립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를 무력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발표는 했지만 당장 개헌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낮은데 정당별 의석 분포에서 집권당과 동맹세력이 과반수를 넘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같은 선제적인 개헌안을 들고 나온 것은 다가오는 대선에서 지지세력에 대해 '결집'을 요구하여 오는 6월2일 총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후임자에게 의제를 설정하기 위해서라는 것으로 정치권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내가 제안하는 개혁은 헌법적 권리를 확립하고 인본주의, 정의, 정직, 긴축, 민주주의와 관련된 이상과 원칙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지만 실제는 현 정부의 장기 집권을 위한 마스터 플랜인 셈이다.
특히. 현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군부를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자치 기관을 약화시켜 행정부에 권력을 집중시키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현 대통령은 사법부에 대해서도 같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1982년부터 2018년까지 36년 동안 4명의 제도혁명당(PRI) 대통령과 2명의 국민행동당(PAN) 대통령이 재임한 이 시기를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시기로 평가절하 하면서 철저한 개혁으로 '구시대의 유물(?)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개헌에 대해 대통령이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루이사 마리아 알칼데(Luisa María Alcalde) 내무부 장관이 하원에 제출한 헌법 개혁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멕시코인 우대
-노인과 장애인에게 정부 연금 보장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
-멕시코의 모든 주민에게 포괄적인 무료 의료 서비스 보장
-노동자가 자신의 집을 소유할 권리 보장
-동물 학대 금지
-물 부족 지역의 물 사용을 가정용 용도로 제한
-펜타닐과 같은 화학 약물의 판매 금지
-정부의 긴축을 국가 정책으로 규정
-광대한 철도망에서 화물차는 물론, 여객 열차가 항상 운행될 수 있도록 개발
-국영 전력회사인 CFE가 고객의 이익과 국익을 위해 운영되는 전략적 공기업으로 남아야 한다는 내용 등이다.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제시한 개헌안 중 일부는 이미 정부 정책과 법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지만, 이를 헌법에 명시하면 추가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어 대통령의 말처럼 "향후 반민중적 좌절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싱크탱크 멕시코 에발루아(México Evalúa)의 마리아나 캄포스(Mariana Campos)에 따르면,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야당이 거부할, 재정적으로 실행 불가능한 개헌을 제안함으로써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즉, 선거운동 기간 동안 의회에서 개헌안이 부결되면 대통령은 6월 2일 총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집권당인 모레나당과 그 동맹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 후보를 한꺼번에 지지해야만 자신의 개혁안이 승인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노림수라는 것이다.
개혁안이 헌법에 포함될지 여부에 대해 "선거가 다가오고 국민이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 개혁안을 제시했다"면서 "이번 선거는 어느 후보가 승리하는가?" 또는 "어느 정당이 승리하는가?"가 아니라 "정치적 프로젝트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한 대통령의 의중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특히, 대통령은 현 정부가 시작한 '변혁' 프로젝트의 지속과 과거로의 회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자주 말하는데, 그는 평범한 멕시코인들을 위한 통치보다 자신과 멕시코 엘리트들의 이익을 챙기는 데 더 관심이 많았던 PRI와 PAN 정부 하에서 부패가 만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헌법 개정안은 상하 양원 의원 3분의 2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의회를 통과할 수 없는데, 모레나와 그 동맹 세력은 현재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6월2일 총선에서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면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이같은 '정치적 꼼수' 가 실제 표로 연결될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다.
특히, 자신의 후임자를 향한 일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후임자는 철저하게 자신의 정치적 의제에 따라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도 계산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의 여론조사대로 선거 결과가 나온다면 여당후보가 대선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일반 대중으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현 대통령은 비록 물러나지만 '상왕'으로 차기 정권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보여 차기 정부 수반의 입지는 좁아들 수밖에 없어 보인다.
"멕시코 유권자들은 로페스 오브라도르에 대해 갖는 정서적 친밀감 때문에 실제 투표로도 크게 연관되어 있다"고 전문가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주요 야 3당은 즉각 반대성명을 내놓았는데, 국민행동당(PAN), 제도혁명당(PRI), 민주혁명당(PRD) 소속 의원들은 대통령의 개헌안 발표가 다가오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AP 통신 보도에 따르면 야당이 지지할 것이라고 밝힌 유일한 제안은 근로자가 은퇴 후 근로 급여 전액을 받을 수 있도록 연금 시스템을 변경하는 것인데, 이는 멕시코보다 훨씬 부유한 나라들조차도 하지 않는 일이이어서 현재의 멕시코 정부의 재정으로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선거철에 각종 선심성 정책을 쏟아내는 현 정부의 입장은 "반드시 정권을 지켜야 한다" 는 배수진을 친 것으로 "반드시 정권을 되찾아 와야 한다" 는 한국 야당의 입장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치러지는 총선, 선거철, 그래서 유권자들의 냉정한 시각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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